by 전명혜

세월호 어머님들을 만났다. 2학년 3반 김도언 학생 어머니 이지성님, 2학년 9반 진윤희 학생 어머니 김순길님께서 2주일간의 일정으로 독일을 방문하시는중에, 1박 2일의 짧은 일정으로 영국을 다녀가셨다. 이번 방문 포스터의 표제는 ‘단원고의 별들, 기억과 만나다’이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지 3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4월의 진도앞 바다는 수많은 개인의 삶들에 크고, 다양한 변곡점을 만들어 내었다. 나는 대비님이 3주기 추모 행사를 끝내며 이에 대한 소감을 담은 글을 한편 써줄 수 있냐고 물어오셨을 때 당황했다. 내가 글을 쓸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에 어떤 메모도 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런던 SOAS에서 열렸던 세미나는 나중에 완전히 개인적인 감정들과 얽히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이 세월호 3주기는 공동체 안에서 함께 노력해온 큰 행사임에도 나에게는 아주 사적인 감정을 담은 추모 행사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이 글은 아주 개인적인 후기이다.

3주기 추모 세미나는 시종일관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지녔던 2주기 추모 간담회에 비하면 촛불항쟁 이후 정권교체의 성공 직후에 열렸던만큼 표면적으로는 좀 더 희망찬 분위기를 담았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세월호’라는 이름 앞에서 얼마나 희망적일 수 있는가? 그 희망은 과연 온전한 희망인가? 기적처럼 독재정권이 몰락하고, 대통령이 바뀌었으니 모든 것들이 ‘곧’ 달라질 것이라 많은 국민들은 생각하지만, 야만의 정권을 떠받들던 자들은 여전히 권력기관 곳곳에 그대로 남아있고, 3년동안 전국의 길 위를 떠돌며 처절한 투쟁을 벌여야 했던 유가족들은 3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선체조사를 통한 진상규명과 세월호 2기 특조위 출범, 특검 실시, 관련자 처벌, 4.16 안전공원 설립등을 외치며 광화문 길 위에서, 안산을 행진하며, 국토를 순례하며 투쟁한다.

법은 언제나 약자를 위로하기에는 너무나 늦고, 적당하게 정의롭고, 적당하게 공감해주며, 적당하게 희망적인 사회는 사실은 피해자들에게는 또다른 이름의 절망일 수 있다.

윤희엄마 김순길님께서 목이 메어 갈라지는 목소리로 세미나 처음 하셨던 말씀은 ‘304명이라는 숫자가 아니라 한명, 한명 기억해 주세요. 304명 이름 모두를 기억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한명의 이름이라도 일상에서 숨쉬듯 기억해 주세요. 이제는 3년이 지났는데 잊어도 되지 않냐고 하실 때, 제일 마음이 아파요’였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앤드류와 공항에 세월호 어머님들을 마중나가기로 했으면서도 이 분들의 따님들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조금만 더 신경써서 이 분들의 이전 행선지였던 베를린에서의 인터뷰도 찾아보고 하였더라면 이 분들이 얼마나 간절히 따님들의 엄마로 불리우기 원한다는 걸 알았을텐데, 나는 그런 것조차 신경쓰지 못하였다. 물론 이것은 나의 나쁜 머리와 멍청함, 게으름 때문이다.

세월호 어머니들은 심지어 자신의 지인이 자신을 도언이엄마나 윤희엄마가 아닌 도언이나 윤희 동생의 이름으로 불러도 혹시 도언이나 윤희를 이제는 잊은 것은 아닌가 하여 그렇게 마음이 아프다고 한다. 이걸 도착할 때부터 알았으면 실컷 그 이름으로 불러드렸을텐데, 고양이 얘기만 실컷했다…

도언이엄마와 윤희엄마는 세미나에서 우리들에게 416 기억저장소4.16 안전공원 설립에 관하여 중점을 두고 말씀하셨다. 416 기록저장소의 목표는 304명의 이루어지지 못했던 꿈들과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의 삶, 이 304명의 꿈을 지켜주려는 시민들의 소망와 노력, 그리고 304명의 삶과 꿈을 앗아간 이들의 행적을 기록, 정리, 보존하는 것이라고 한다.

세상 사람들이 304명이라는 단순한 숫자로 기억할 때 한 명의 삶이라도 제대로 기억하기 위하여 자신의 온전한 시간을 내어주고, 억울한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고, 편이 되어주며, 손을 잡아주는 것, 누군가는 이 단 한 번의 온전한 공감으로 겨울을 버틸 것이다. 그런데 지난 3년동안 세월호 참사의 진실과 정의를 외쳤던 나는 아직 거의 모든 희생자의 삶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사실 너무나 많은 시간을 세월호 참사를 통해 나의 삶과 상처를 돌아보며 위로받기에 급급했다…

이번 세미나에서 신혜란 교수는 이미 발표되었던 자신의 논문 ‘The territorialisation of memory: the making of place of memory for Sewol Ferry accident’를 축약해서 발표하였다. 이 발표는 안산 단원고의 기억교실과 서울 광화문 광장, 제주 기억공간 이렇게 세 곳의 세월호 기억공간을 언급하는데, 강의실 한켠에 앉아서 이 발표를 들으시던 어머님들이 활동하시는 기억저장소에서는 기억교실과 관련한 많은 활동을 벌이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기억교실. 나는 십대의 꿈많은 아이들이 오로지 더 좋은 대학을 가기위해 아침 8시부터 밤 10시 30분까지 일상을 보내야 하는 이 대한민국의 교실들이 참사가 아니여도 이미 너무나 슬프고, 끔찍하다. 어떤 십대들은 이미 이 교실에서 죽음을 생각하고, 이 세상을 떠나간다.

기억교실의 달력은 2014년 4월에 멈춰 있고, 단원고 학생 250명과 교사 11명은 돌아오지 못했다. 유가족들에게 기억교실은 가족, 자식의 마지막 흔적이 가장 많이 담겨있는 너무나 그리운 곳이지만, 진상규명과 인양, 실종자 수습등을 외치며 정작 수많은 시간을 길 위에서 보내느라 유가족들이 기억교실에는 마음만큼 신경을 많이 쓰지 못했다고 한다.

유가족들은 세월호 참사 2주기후 결국 자식들의 마지막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그 곳을 자신의 손으로 뜯어내고, 들어내고, 박스에 담아, 제대로 준비도 안되어 있는 작은 임시건물로 옮겼다. 학교운영위원회 측은 강경한 태도를 보이다 못해 물리적 행동도 서슴치 않았고, 세월호 유가족들의 편을 들어주던 국민들도 학생들의 학습권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예민하였다. 대한민국에서는 착하고, 바르고, 정의롭지만 공부는 그리 잘하지 못하는 자식보다, 선하고, 바르지 않아도 좋으니 좋은 대학 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 부모들이 사실은 얼마나 많을까?

이 단원고에 기억교실을 남겨두면 학생들의 학습권을 방해한다며 이전과 철거에 심정적으로 찬성하던 국민들은 안산에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은 지금 안산에서 집값이 떨어질까봐 4.16 안전공원 설립에 반대하는 이들과 많이 다를까?

얼마전 안산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416 안전공원 전문가 심포지엄’이 주민들의 난동으로 파행되었다. 주최측은 반대의견을 낼 수 있도록 발언권을 주겠다고 했으나, ‘죽은 사람은 뒷산으로 가라’, ‘유원지에 납골당이 웬말이냐. 분향소 3년도 너무 피곤하다.’등의 고성을 지르며 회의장을 점거하다가, 결국 회의가 취소되자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유가족에게, 그곳도 한 동네 이웃에게 ‘죽은 사람은 뒷 산으로 가라’고 말할 수 있는 천박함, 인간이기를 포기한 저 파렴치함, 나는 저 죽은 사람 운운하는 말이 과거 친박단체들의 폭식투쟁을 보는 것처럼 소름끼쳤다.

한국 현대사의 모든 병폐가 응축된 이 세월호 참사에 역사상 가장 비인간적인 정권의 온갖 피해를 고스란히 안고서 여전히 길 위에 있는 유가족들에게 많은 이들이 이제는 잊고,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도언이, 윤희 어머님은 온갖 부인과 병을 다 얻었지만, 길 가에 앉아있는 것보다 이제는 잊고,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그 말을 듣는 것이 제일 힘들다고 하신다.

그들이 잊고 돌아갈 수 있는 일상은 어떤 일상인가? 그 일상이 어디에 있는가? 지금 세월호 유가족들이 안간힘으로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은 일상이 아니라는 건가?

내가 글을 교환하며 지내는 한국 대학의 한 교수님은 아들이 군장교의 가혹행위를 견디다 못해 자살을 하였는데, 군은 오랫동안 이 사건을 은폐, 조작 하였고, 책임을 면하기 위하여 아들을 정신질환자로 몰았다. 진상이 밝혀졌지만, 배경이 든든한 장교는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 교수님은 시간이 지난 후 마치 겉으로는 강의도 하시고, 일상으로 돌아가 지내시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곳에서 아들과 대화를 하고, 모든 곳에서 아들을 기다리고, 자신이 지나다니는 모든 곳에서 아들의 모습을 본다. 촛불혁명이 있던 그 광화문에서도 이 교수는 아들과 함께 했다.

이 분에게 세월호 유가족들은 그 슬픔이 너무나 오로지 전달되어 가끔은 외면해야 하는 분들이다. 자식을 먼저 떠난 사람이 많은 것에 위안을 얻는 못된 생각이 들 때도 있다고 한다. 그러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식을 먼저 떠나 보내기를 바라는 천벌을 받을 생각에 이르면, 그런데 이미 나는 천벌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신다고. 이 아버지는 나에게 ‘다음에 자신의 아들을 만나시거든’이라는 말씀을 많이 하신다.

다음 세상에 죽어서도 가지고 갈 아픔일 것이다. 평생 남아 있는 이별일 것이다. 타인의 상처에 대한 깊이를 잘 알지 못하면서 상대방을 적당히 위하는척 함부로 충고하는 것은 절망에 대한 희롱이다.

도언이어머니와 윤희어머니는 2주간의 유럽방문을 마치고 귀국 하루만에 ‘유럽방문 보고발표회’를 가지셨는데, 이 발표회는 ‘목요문화제 기억, 그리고 희망’에서 생중계되었다. 영국에서 뵈었을 때는 씩씩하셨던 도언이엄마 이진성님이 많이 우시는 모습에 마음이 무거웠다. 도언이엄마는 3년이 지났어도 진상규명이 되지 못했고, 미수습자 분들도 모두 찾지 못했는데 이렇게 외국에 나가서 많은 분들을 만나게 되어 부끄러웠다고 우셨다.

두 분의 어머님이 자주 하셨던 말씀은 외국에 계신 분들은 한국과는 달리 참 따뜻하셨다, 심지어 외국인들도 따뜻하더라, 근데 왜 같은 한국인들이 우리에게 그렇게 상처를 주는걸까요… 였다. 나는 이 말이 내 마음을 너무 아프게 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이제 왠만한 상처에는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그분들은 따뜻한 온기와 감촉이 너무나 그립다.

두 분의 어머님들은 무엇보다 유럽이 가지고 있는 그 기록의 문화를 너무나 부러워하였다. 수십년, 수백년에 걸쳐서 참사를 기록하고,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문화.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에서 모든 행복한 가정은 대부분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고 말하였듯이, 모든 304명의 희생자와 그 가족의 불행은 당연히 모두 제 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그 불행이 304명의 죽음으로 쉽게 분류되어 잊혀지지 않도록, 그래서 그 각각의 유일무이한 불행이 남겨질 수 있도록 우리는 지켜줘야 한다. 나는 이 과정이 궁극적으로는 이 희생자분들의 꿈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한국을 떠나기 전에 화상과 상처로 뒤덮인 앙상한 몸으로 지독한 영양실조에 시달리다 집에서 구조된 아이가 있었다. 한살 위 누나는 이미 5개월 전에 영양실조로 죽어 마당에 파묻혀 있었다. 아이의 누나는 너무 배가고파 냉장고에 아이스크림을 훔쳐먹다 친부와 새엄마에게 폭행을 당한후, 차가운 방에서 숨져갔다. 이 누나에게 폭력의 위협 속에서도 몰래 밥을 주던 여섯 살 남동생은 구조된 후 죽은 누나가 유령이 되어 꿈에 나타날 때마다 더이상 무서워하지 않고 누나가 보고 싶다고, 자신을 지켜주려 해서 고맙다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17년이 걸렸다. 이 17년의 시간동안 이 소년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상담원과 전문가, 의사, 자원봉사자들이 이 소년의 곁을 포기하지 않고 지켰다. 이제 성인이 된 이 소년의 꿈은 잘 웃는 친절한,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에서 마지막으로 구조된 생존자 학생은 한 인터뷰에서 결국 자신이 손을 놓았던 한 여학생이 잘 때마다 꿈에 나타난다고 고백하였다. 이 학생이 여학생과 꿈 속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기까지 17년의 시간이, 아니 어쩌면 더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너의 잘못이 아니였다고 17년동안 곁에서 따뜻하게 인내를 가지고 이야기 해 줄 많은 친구들이 그 소년곁에 있을 것이다…

17년은 내가 영국에서 살아온 시간이다. 이 시간동안 누군가는 여전히 생존을 위하여 싸우고 있었다. 영국에서 살아오며 수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나에게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은 Remembering Sewol Disaster UK라는 그룹을 만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16년동안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았었던 내 고국에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고 있다. 그 과정이 여러기억을 불러일으키고, 수많은 감정의 혼란과 원망으로 밤을 지새우는 날들도 있었지만, 나같이 하찮은 인간도 이 멀리서 세월호 참사를 위하여 아주 조금이나마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매 달 집회를 나가면서 내 한국에서의 삶이 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떠오를 때가 있다. 언젠가 나도 한국에서 행복했던 날들도 있었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3주기 추모 세미나를 시작하셨던 신주욱 작가께서 세월호 참사 후 4월말 통영 벽화마을에 많은 꽃들로 이루어진 큰 벽화를 그렸던 이유가 누군가 그 벽화를 보며 진도 앞바다에서 아무 이유도 없이 희생된 꽃보다 더 풍성하고, 아름다운 아이들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였다고 하셨다.

나는 그 누군가가 혹 벽화를 보고 난 후 그 따뜻한 위로의 힘으로 일생을 견딜 수도 있다고 믿는다. 나는 내 위로가 단 하룻밤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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